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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박씨

퇴계의 어머니 춘천 박씨




퇴계의 어머니 춘천박씨는 춘천시 퇴계동 무린개 즉 무릉계가 관향이었다. 춘천박씨 판사공 원비의 5세손 박치의 3남 2녀중 장녀가 퇴계의 어머니 박씨부인이었다.

박씨부인이 퇴계의 아버지 이식에게 시집을 가 아들 4형제를 낳았다. 이의, 이해, 이징 그리고 이황이 박부인이 낳은 네 아들이었다. 퇴계는 6남 1녀중 막내였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퇴계의 부친은 퇴계가 태어난 다음해 6월에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퇴계는 부친의 묘갈명에 「공께서 일찍이 씀하시되, 내 아들이 능히 내 업을 계승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퇴계에게 있어서 그 만큼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나 행복한 그 무엇도 남겨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는 퇴계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깊은 영향을 받았다. 퇴계의 어머니는 보통 어머니였다.흔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순수하고 소박하며 의지와 겸양으로 자식을 잘 기르려는 보통 어머니였다. 자식자랑은 전연 내색하기를 싫어하던 평범하나 전형적인 한국의 보통 어머니 모습 그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퇴계의 어머니 박씨부인은 위대하게 보인다. 퇴계는 「선비 증정부인 박씨 묘갈지」에 어머니에 대한 사모와 존경의념을 한량없이 나타내면서 그 생애를 감동깊게 묘사하고 있다. 아랫사람을 대하기는 엄하면서 자애로왔다. 노비들을 거느리는 데는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의롭자고 하였다. 길쌈을 하여 생활을 하였으나, 밤새도록 하여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신유년(1501년)에 아버지께서 진사를 급제하시고 다음에 6월에 병으로 돌아가시니 그 때 맏형님이 겨우 장가를 들었을 뿐 그 나머지는 모두 어렸다. 어머님께서 깊이 생각하시기를 많은 아들을 두고 초년에 과부가 되어 가문을 잇지 못하고 마침내 시집 장가를 떳떳이 보내지 못하게 된다면 이는 크게 근심스럽고 두려운 일이라 하였다. 박씨 부인은 그 많은 자식들을 홀로 키웠던 것이다. 부인은 자식은 많고 일찍이 홀몸이 되어 장차 집안을 유지하지 못할 것을 뼈아프게 염려해서 더욱 농사짓기와 양잠일에 힘을 써서 옛살림을 잃지 아니하였고, 여러 아들이 점점 장성하게 되자 가난한 중에도학비를 내어 먼데나 가까운데나 취학을 시켜서 매양 훈계하였으니, 무릇 문장에만 힘쓸 뿐 아니라, 특히 몸가짐과 행실을 삼가는 것을 중하게 여겨서 항상 재삼 간절히 타이르기를 세상에서는 보통 과부의 자식을 옳게 가르치지 못하였다고 욕을 할 것이니 너희들이 남보다 백배 더 공부에 힘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비평을 면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이것을 보면 선생은 비록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그 학문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어머니에게 얻은 바가 많았다. 퇴계 연보에 퇴계 어머니의 훈도가 퇴계의 생애를 절대적으로 결정했던 사실을 공인해 주고 있다.

「문자를 배운 적은 없으나 평소에 늘 들은 아버님의 정훈과 여러 아들이 서로 강습하는 것을 들어서 가끔 깨우쳐 이해하는 바가 있었으며, 의리로 비유하여 사정을 밝게 하는 지식과 생각은 마치 사군자와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만 지니고 있을 뿐 겉으로는 항상 조용하고 조심할 뿐이었다. 정유년(서기 1537년) 10월 15일에 병환으로 돌아가시니 수는 68세였다. 춘천박씨부인, 퇴계의 어머니가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알고 있던 지식과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자녀들로 하여금 실천 · 실행케 했던데 있었다.

퇴계 어머니 박씨부인이 퇴계 형제들을 교육한 방법은 외양보다 내실을 닦았고, 또 그것을 보통의 어머니로서 실천했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과는 또 다른 조선시대 여성의 교육의 표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