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헌항귀비 엄씨
순헌황귀비 엄(嚴)씨
엄비는 영월엄씨 엄진삼이 한미한 선비로 있을 때인 1854년 음력 6월 6일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8세 때에 경북궁으로 입궁, 항아님으로 자랐다. 후에는 명성왕후전에서 임금을 모시고 호위하는 상궁인 시위상궁이 되었다. 민비는 고종(高宗)에게 엄상궁이 성은을 입은 것을 알고 몹시 미워하여 죽이려 하기까지 했다. 고종이 말려서 엄상궁은 화를 면했다는 일화도 있다.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왜병의 손에 참혹하게 시해를 당했다. 민비시해, 단발령으로 민심이 극도로 동요되고 있을 때 춘천에서 의병봉기가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병신년 2월에 친로파 이범진 등이 노국공사 웨베르와 결탁하여 왕과 왕세자를 노국공관으로 파천케 했다. 엄상궁은 그때 고종을 모시고 측근에서 시위했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정치적 위해와 인간적 고독을 달래면서 엄상궁을 가까이 했다. 엄상궁은 1897년 음력 9월 44세에 왕자를 낳았다. 엄상궁은 경선당의 당호를 받았고 이어서 선영 귀인에 책봉되고 뒤이어 순비 순헌귀비로서 황귀비에 봉해졌다.
엄비가 낳은 제4왕자 은에 대한 교육은 엄격했고, 부자유친보다 군신유의를 우선케 했다. 은은 4살 때인 1900년 영친왕으로 책봉되었다. 황태자인 순종에게 왕자가 없었으므로 순종의 등극과 함께 영친왕은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고종이 가장 아끼고 귀여워 하던 왕자였다. 그러나 헤이그밀사 사건을 트집 잡아 고종을 강제로 양위케한 이등박문은 11세의 어린 영친왕을 일본 동경으로 유학시킨다는 명목을 붙어 강제로 데려갔다. 어쩔수 없이 떠나보내는 아들 영친왕에게 엄비는 「대한제국 황태자라는 긍지를 잃지 말라」고 다짐케 했다.고종도 참을 인(忍)을 써주며 「기쁠때나 슬플때나 감정을 나타내지 말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라」고 당부했다. 엄비는 망국의 왕비로서 철천지 한을 품고 58세 되던 1911년 6월 25일 덕수궁에서 돌아가셨다.
엄비가 마지막 남긴 말은 「은을 못보고 죽는게 한이 된다. 이등박문은 여름방학에 내보내 준다고 하고서는..」이었다. 엄비의 망국한은 곧 한국인의 그것 이었고, 한국여성의 그것 이었다. 계몽과 교육을 통해 폭풍우 앞에 촛불과 같은 이 나라 이 겨레를 구하려 한 1906년 4월 엄비는 여성 선구자 중 한사람인 순헌황귀비 엄씨였다. 진명여학교를 설립했고 5월에는 숙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를 창설했다. 엄비는 진명과 명신여학교를 설립하기 1년전인 1905년 10월 1일에 벌써 양정의숙을 설립했었다.당시 군부참모장이던 친정 조카 엄주익에게 함평에 있는 국유지 논 40만평과 귀비의 내탕금으로 사 두었던 개성의 논 33만평 그리고 이천의 58만평 광양의 35만평의 옥답으로 재단을 만들었다. 진명여학교를 세울 때는 군부총장이던 친정 사촌동생 엄준원을 시켜 경선궁 소속 재산인 강화군의 토지 전답 임야 등 118,154평과부천 토지 775,242평 지하골의 1천평 대지와 기와집 1채를 재단으로 제공케 했다. 이런 엄비를 가르켜 당시 궁중에서는 도량이 넓고 두뇌가 명석하며 성품이 활발한 여걸이라고 일컬었다. 엄비는 양정학교를 한국식으로 진명여학교를 서양식으로 명신은 일본식 계통으로 교육을 해보자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온다. 아무튼 사재를 들여 일시에 양정, 진명, 명신 세학교를 설립한 것은 구국의 큰 뜻을 세운데서 엄비가 예사 여성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엄비가 영월에서 또는 원주에서 탄생했다고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엄비가 세운 양정, 진명, 명신학교는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산역사의 산실로 발전을 거듭했다.
한국여성의 손으로 한국여성 교육의 장을 창설했다. 엄비의 큰 포부가 지금도 살아 있어 큰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