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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열왕후

인열왕후




인열왕후(仁烈王后)는 조선 왕조 제 16대 인조(仁祖)의 왕비로 성은 한(韓)씨 본관은 청주(淸州)다.

그는 구암공파의 시조이고 실학자인 한백겸(韓白謙)의 동생이며 서평부원군파(西平府院君派) 혹은문익공파(文翼公派)의 시조인 당시 원주목사 한준겸(韓俊謙)의 넷째딸로 1594(선조 : 宣祖 27년) 원주읍내 인동(仁洞)에서 태어났다.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조선왕조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처족으로 명문 거족이며 이 명문에서출생한 인열왕후는 선조때 이미 능양군(陵陽君)과 정혼(定婚)한 처지였다. 1611년(광해군: 光海君 2년) 능양군 나이 16세, 인열왕후는 17세 때 혼례를 치렀으며 능양군의 부인이 되자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으로 봉해졌다. 이때의 능양군이나 청성현부인은 왕위에 오를 생각도 못했던 때였다. 그러나 광해군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라 인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능양군이 정치활동에 대단히 능란(能爛)한 인물이었다는 이유도 있지만그의 어머니 인빈(仁嬪)의 왕실 부덕이 특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동서당쟁의 물결속에 광해조(光海組) 당시 대북파의 집권에 반발한 서인(西人)의 정치적 계산이 우선한 결과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나타냈으나 선조의 14남 중에서 구태여 정원군(定遠君)의 아들인능양군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능양군의 할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역할과 광해군을 몰아내는혁명 공작에 능양군이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며 인목대비와 인빈의 사이가 남달리 좋았던 점을 들 수 있겠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혼례를 치른지 13년만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651년(효종:孝宗 2년)엔 휘호명덕정순(明德貞順)이 추상되었으며, 시책문(試冊文)을 재간하고 신주(新主)를 게제하였다. 조선왕조 왕비 중인자한 왕비로 이름을 떨친 왕비는 효종 소현세자(昭顯世子), 인평대군(麟坪大君), 용성대군(龍城大君)을낳았으며, 능은 장릉(長陵)에 있다.

인열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었을 때 출생지인 원주에 인열왕후지비(仁烈王后之碑)가 세워졌고 하마비(河馬碑)도 역시 인동에 세워졌다. 조선에서는 왕이나 왕후의 호는 업적 성품을 고려해서 종부시와예조(禮曺) 그리고 춘추관(春秋館)이 관련하여 결정한다. 인조나 인열왕후라고 하는 데서 벌써 인자했던성품을 알 수 있는 것이며, 왕호(王號)의 호에서 「仁」자가 같이 붙어 있어 두사람이 모두 인후한성품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일화는 광해군 때의 옛 궁인(宮人)이라 할지라도 나이 늙고 죄없는 사람은 궁중에서그대로 일을 보게 하였다. 그 중에 보향(保香)이란 궁녀가 옛 임금 광해군을 잊지 못하여 가끔 숨어서 울곤하였다. 이 것을 함께 있던 궁녀가 인열왕후에게 「보향이 옛 임금을 생각하니 변이 있을까 두렵다」하고밀고 하니, 왕후가 이르기를 「그는 외로운 사람이다」하고는 보향을 불러 위로하기를,「국가의 흥망은 무상한 것으로, 우리 임금(仁祖)이 하늘의 힘을 입어서 오늘이 있는 것이지마는어찌 훗날 다시 광해군처럼 왕위를 잃을지 어찌 알겠느냐. 너의 마음가짐이 그와 같이 의로우니가히 내 아들을 보육할 만하다」고 말하며, 보모상궁(保姆尙宮)을 삼았다. 한편 밀고한 궁녀는 종아리를 때리고 그 인성을 꾸짖었다고 한다. 또 한편을 보면 광해군이 제주도 유배지에서 별세한 것은 1641년(인조 19년)의 일이다. 광해군은 7월 7일이기일(忌日)인데 그해 5월 21일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던 광해군의 아들이 도망치려다가 잡힌 일이 생겼다.사실은 그의 아내와 나인들이 유배소에서 벽을 뚫고 밤에 옛 동궁(東宮)을 도망치게 했는데 이튿날 잡혀버렸다. 그리하여 왕실에서는 폐 동궁에 대한 처벌 문제가 크게 논란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이자는주장을 내세웠다.
이때에 인열왕후는 다음과 같이 인조에게 고하였다. 「폐 동궁의 죄를 다루어 살리고 죽이는 것을 부녀자가 알바 아니오만 나라의 흥망은 덕의여하(德義如何)에있는 것이며 덕의여하는 마음에 달렸으니 마음으로 결단하는 것은 실로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오니까?그리고 옛날 아침에 천자(天者)가 되었다가 저물어서는 필부(匹夫)가 되고자 하여도 얻지 못한 일이있었사오니 상감께서 오늘날에 조심하시면 다시는 전하(殿下)와 같이 어진 임금은 없을 줄 아나이다. 원컨데 그를 죽이지 마시와 다른날 우리 자손 보존할 계획을 세우시옵소서」하였다 한다.

25남매의 시아버지 틈에 출가한 부녀자라면 시가에서는 옛날 우리들의 윤리체제에서는 원만하게 행세하기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왕실이고 더구나 임해군, 영창대군(永昌大君)등이 비명에 죽어야 했고, 가진 골육상쟁(骨肉相爭)이 지나간 광해조 뒤 인조조에 있어서는 재연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인조가 아니었던들 동서당쟁은 왕가의 형제상쟁을 기화로 더욱 심했을지 모르고, 인열왕후가 아니었던들 궁중비화(宮中悲話)는 더욱눈물겨운 피비린내를 우리들에게 전해졌을지 모를 일이다. 인열왕후가 자기 왕실의 적인 광해군의 아들이 반란하기 위해 도망치다가 잡힌 것을 용서하는 아량,그리고 자기를 배반하는 궁녀 보향을 포용할 수 있는 치마 두른 여중군자(女中君子) 그야말로 인생에자신있는 태도가 아닌가 이렇듯 인조를 보필하며 치적을 쌓은 왕후도 여자이기에 출생지인 고향 원주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대단하여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고 한다. 인조반란 등 혼란한 시대에 왕가를 이끌어온 왕후는 1653년(인조13년) 41세를 일기로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이와 같이 인자하고 후덕했던 왕후의 탄생지비가 없어진 것을 안타까워 하던 중 1984년 5월 재원지구청주한씨 종친회에서 원주시 개운동 415번지(원고앞) 가로공원내에 왕후의 탄생지비를 재건립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