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열여성4
남편이 물에 빠지자 함께 죽은 이씨
영월읍 상옥2리에는 정의영의 처 이씨부인의 열녀각이 있다. 이씨부인은 남편이 배를 타다 물에 빠져 죽은 유해를 건지지 못하자, 서러워한 나머지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다. 高宗 8년(1871)에 문중에서 그녀의 烈行을 기리기 위해 열녀각을 세웠다.
金知鶴의 처 李氏 孝婦門
영월읍 하송리 학랑골 석정여중고로 가는 길옆에는 김지학의 처 慶州李氏 부인의 孝婦旌閭門이 있다. 김지학의 처 이씨는 가족들이 모두 밖에 나가고 없을 때, 시아버지의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회생케 했다. 高宗 4년(1867) 조정에서 정려문을 내려 표창하였다.
崔順俊의 처 延日鄭氏 孝婦門
영월읍 연하리 반송마을에는 최순준의 처 연일정씨의 효부문이 서 있다.연일정씨는 시부모가 식사 중에 자식이 죽었다 하여 남편이 부모에게 고하려 하자, 부모의 식사가 끝날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가 고하게 했고, 시부모 앞에서는 눈물 한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혼자된 시아버지를 정성들여 봉양했고, 시아버지가 불치의 병으로 눕게 되자 대소변을 받아 내면서 20년여간을 하루같이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다.끝내 시아버지가 죽자 장례를 극진히 모시고 매일 산소를 참배하였다. 이때 호랑이가 늘 멀리서 호위해 주었고,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出天之 孝婦"라 칭송하였다. 후에 高宗 31년(1894) 觀察使가 알고 직접 확인하고 효부분을 세웠다.
17세에 남편잃은 李氏婦人
인제군 상남면 자포대마을에는 全州李氏 부인의 정려각이 있다. 이씨부인은 시골에서 자라 선비인 민영통에게 시집가서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배운 바는 없었지만 타고난 천성이 밝아 시부모를 성심껏 모셨고 남편을 공경하였다. 그녀가 17세 되던 해에 남편이 죽자 3년상을 치루고, 첫 기일에 곡기를 끊고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였다. 고종 37년(1900) 10월 상순에 郡守 권직상과 관찰사 조필종 등이 당시 이씨부인의 정절을 기려 旌閭閣을 세웠다.
용촌마을의 延安金氏 烈女門
연안김씨는 남편 노병곤이 15년동안 병을 앓았는데 그녀는 남편을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해 치료했으나 별 효험이 없었다. 그리고 남편의 생명이 위독해지자 자기의 살을 베어 약을 만들어 치료했으나, 이 또한 효험이 없었다. 긴병에 효자가 없다고 하였으나 부인은 남편 병치료에 하루같이 정성을 다하였다. 끝내 남편이 사망하자 부인은 돌아간 남편의 魂을 모시겠다는 다짐을 하고 조카를 양자를 맞아들였고, 수절하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연안김씨가 가문을 지키고 수절한 높은 뜻을 기려 문중에서 哲宗 1년(1850년)에 고성군 토성면 용촌2리에 열녀각을 세웠다.
睦致中의 妻 寧越嚴氏 烈女閣
처 영월엄씨 열녀각이 있다. 영월엄씨는 남편 목치중이 공부 중에 병사하게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장사날 함께 죽었다. 正組 13년(1789) 나라에서 열녀정문을 내렸다. 목치중과 엄씨부인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평소 다짐했는데, 목치중의 발인날 상여가 움직이지 않자 부인은 남편과의 약속이 생각나서 식칼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고 한다.
暗埋葬한 시체를 이전한 鄭氏婦人
평창 대화면 하안미리 국도변에는 박진명의 처 정씨 효열비가 서 있다. 정씨는 천성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시부모의 산소 옆에 누군가 시체를 암매장한 것을 알게 되었다. 정씨 부인은 이 암매장한 시체를 파서 官家에 고발하여 시부모의 산소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정씨의 효도가 알려져 1925년 2월 15일에 효열부로 旌閭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