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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생활문화

강원특별자치도의 농산물 활용 및 농촌생활문화 이해를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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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농촌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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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열여성2

원주원씨 열녀각

원주원씨는 15세에 출가하여 결혼 첫날 밤 남편이 사망하였으나 개가하지 않고 70평생 수절을 하였다. 그는 양자를 맞아 자식으로 삼고 친모 이상으로 잘 키우면서 시부모님께도 지극한 효도를 다하고 일생을 마쳤다. 그 뜻을 후손에게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1969년 열녀각을 지어 매년 제사를 지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秋秉珏의 妻 慶州金氏 烈女門

열녀 경주김씨 부인은 15세에 결혼하여 20세에 첫 아들을 낳고 남편을 잃게 되자 주위에서 개가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정절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시아버지가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는 등 극진한 병시중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이 같은 사연을 듣고 孝烈婦의 정문을 내렸고, 대동출판협회에서는 그의 효열을 높이 여겨 표창하였다. 경주김씨 열녀문은 원주시 소초면 교항1리에 있다.

대전동 江陵崔氏·江陵金氏 樹聲閣

강릉시 대전동 산 27번지에는 權處平의 처 강릉최씨와 權處道의 처 강릉김씨를 기린 수성각이 있다.강릉최씨는 壬辰倭亂때 왜적을 피해 숨어 있다가 왜적에 붙들리게 되었다. 왜적이 최씨부인을 희롱하며 달려드니 왜적을 산속으로 유인하여 벼랑 위에서 왜구의 허리를 잡고 함께 뛰어내려 같이 죽어 貞烈을 끝까지 지켰다. 權處道의 처 강릉김씨도 왜적에게 붙잡혀 항거하다 끝내 왜놈의 칼에 희생되었다. 선조때 이들을 기리기 위해 旌閭가 내려졌다.

崔世昌의 婦人 金氏 烈女碑閣

강릉에 살던 최세창은 평소 술을 즐겨 살림 형편이 곤궁했다. 그러나 그의 처 김씨부인은 여필종부란 孝烈의 길을 걸었다. 술과 가난으로 몸이 쇠약해진 남편이 슬하에 어린 자식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그녀는 남편의 장례식날 자기의 옷 한벌과 머리카락을 잘라 관 속에다 넣었다. 남편과 사별한 사이지만 마음은 항상 남편 곁에 있어 남겨놓은 자식을 훌륭히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살았고 그 정열을 기리기 위해 中宗 16년(1521)에 마을사람에 의해 烈女閣이 세워졌다. 碑文은 申光漢이 짓고 李來云이 비석을 세웠다.

張振文의 妻 金氏 烈女碑

장진문의 처 김씨는 강릉 儒林 金潤身의 손녀로서, 20세에 남편을 여의고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때부터 김씨는 문밖 출입을 삼가고 홀로 되신 시어머니를 정성으로 봉양했으며 朝夕으로 조상의 神主 앞에 祭를드리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소에 이가 보이도록 웃지 않았고, 집안 일을 조용히 꾸려 나갔다.中宗 39년(1544) 부인의 정열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를 받아 옥천동에 旌閭閣이 세워졌으나 후에 정동산 25번지로 移建하였다.

호랑이에게 藥받은 沈氏

삼척 미로면 상거리 출신의 심씨부인은 18세에 사헌부 감찰을 지낸 김인섭에게 출가하였다. 남편이 죽자 그는 어린 남매의 양육과 시부모 봉양, 농사일,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녀는 청상과부로 수절해야겠다는 의지로 외간 남자는 물론 집안 남녀간의 同席도 조심하였고 친가에도 가지 않고 집안 돌보는 데만 힘썼다. 시부모가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자기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해도 낫지 않자 산에 올라가 시부모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하늘에 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하던 중 호랑이가 약을 주었고 그 약으로 시부모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哲宗 11년(1860)에 이러한 일로 열녀각이 북삼동에 서게 되었다.

남편따라 죽은 이씨부인

金政敎에게 시집 온 옥천이씨 부인은 남편이 병들어 눕게 되자 백방으로 간호를 했으나 효험이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손가락을 잘라 남편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여 겨우 연명할 수 있게 했다. 평소 부부의 금슬이 좋기로 마을에 소문이 났었다. 부인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병은 깊어 갔고 끝내 사망하게되었다. 이씨부인은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 하면서 밤낮을 눈물로 보내다가 한달 후에 남편을 따라 죽었다.1891년 옥천이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가문에서 열녀각을 세웠다.

독약을 먹고 남편 따른 鄭氏

延日 鄭氏婦人은 북평 쇄운에서 태어나 金漢卿에게 시집가서 열심히 남편과 시부모를 섬겼다. 그녀가 22세 되던 해에 남편이 병으로 자리를 눕게 되자 그녀의 목욕재개하고 신령님께 남편의 쾌유를 빌었으며, 백방을 수소문하여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손가락을 잘라 나온 피로 약을 만들어 공양하였더니 남편의 병이 완쾌되었다. 그리고 시부모가 노환으로 눕자 돌아가실 때까지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시중을 들었으며,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생시와 같이 묘소를 돌보았다. 그 후 남편이 병을 앓다가 죽자 자기의 덕이 부족하여 죽었다고 한탄하고, 가족 몰래 독약을 먹고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旌閭하여 열녀비각을 내렸고, 북삼동에 연일정씨 열녀각이서 있다.

다섯 손가락을 모두 자른 洪氏

金宗厚의 부인 南陽 洪氏는 남편이 병으로 자리를 눕게 되자 정성으로 간호하였고, 남편의 병이 차도가없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다. 그러자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얼마 못가서 다리 자리에눕게 되었다. 그래서 두 번째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였더니 남편의 병이 조금 나았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다섯 번, 다섯 손가락을 모두 잘라 피를 마시게 했으나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고 남편이 죽게 되었다.그녀는 정성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남편을 따라 죽으려 했으나 어린 자식들이 울면서 만류하여 죽지 못하였다. 남편의 뒤를 따르지 못한 그녀는 자식들을 돌보면서 자신은 10여년 동안 머리손질과 세수를 하지 않았고, 또한 魚肉을 먹지도 않았다. 입은 옷은 빨지 않았고 친족도 만나지 않았다. 절기마다 남편의 새 옷을 장만하여 묘소에 두었다가 태우곤 하였다. 그녀는 효성도 지극하여 부친이 종기를 앓자 입으로 종기를 빨아 근을 뽑아내 낫게 하였다. 남편이 죽은지 10년이 넘었고 자녀들도 모두 출가시켜 해야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남편을 따라 죽더라도 별탈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날 밤 조용히 목숨을 끊었다. 1839년 남양홍씨의 열녀비각을 조정에서 내렸고 동해시 북평동에 이 열녀비각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