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열여성1
살을 베어 시어머니 병구완 한 강릉 최씨
경주 이씨의 孝井
춘천시 남면 가정리 약바위 서쪽에는 효정이라는 샘물이 있다. 조선 철종때 효성이 지극한 柳重履와 그의 아내 경주이씨는 매일 새벽 일어나 맑은 물을 길어다 부모님에게 드리고, 산새와 물고기를 잡아다 부모를 공양하였다. 어느날 이씨는 심산유곡에서 맑은 물을 길어다 시부모님에게 드리고 밥을 짓다가 잠시 잠이 들었다, 비몽사몽간에 백발노인이 부엌 실광 밑을 파면 샘이 솟을 것이라고 일러주는 것이었다. 잠에세 깬 이씨부인이 실광 밑을 파보니 과연 샘물이 솟아났다. 매일 산골짜기에서 물을 길어오지 않고 샘에서 솟는 물을 시부모에게 드리게 되었다. 이에 從祖인 참판 柳永河가 孝井記를 지어 크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남편따라 자결한 함평 이씨
춘천시 남면 발산2리에 함평 이씨 열녀문이 있다. 200여년 전 유준의 처 함평 이씨는 결혼 후 곧 남편과 사별했다. 남편의 3년상을 마친 후 이씨 부인은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다. 남편의 3년상을 치루어 남편을 받드는 일을 모두 끝냈으므로 이씨는 마음 편히 죽을 수 있었다. 함평이씨는 남편에 대한 烈行이 지극하다하여 나라에서 열녀문을 내렸다고 한다.
남편의 병과 목숨을 바꾼 고령 신씨
춘천시 남면 발산2리에 고령 신씨 열녀문이 있다. 그녀는 남편 김은명이 병으로 목숨이 위태롭자 제단을 차려놓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남편의 병이 낫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자신의 목숨을 바꾸어서라도 남편을 쾌유시켜 달라고 3년 3개월 동안 빌었다. 그녀의 기도에 감동했는지 남편의 병이 나았으므로 신에게 약속한 대로 자결하였다. 자신의 목숨을 끊고 남편을 살린 열행이 지극하다 하여 나라에서 열녀문을 내렸다.
남편따라 자결한 파평 윤씨
춘천시 서면 현암리 산 34번지에는 파평 윤씨 열녀각이 있다. 그녀는 정유에게 시집가서 시부모를 정성으로 공경하여 그 효성이 인근에서 따를 자가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편 정유가 1790년에 病死하였다. 그녀는 유복자 방선을 출산하고 남편의 3년상을 치뤘다. 독자로 태어난 방선이 3세가 되던 해인 1793년에 가문을 이을 아들을 시부모에게 맡기고 남편의 뒤를 자결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는 파평 윤씨의 효성과 정절을 알게 되어 正祖 4년(1797)에 나라에서 旌閭하였다.
二烈女門의 許氏와 朴氏
열녀 허씨는 남편 權用聖이 전염병으로 죽자 남편의 뒤를 따라 목숨을 끊었고, 열녀 박씨도 남편 權用燁이 전염병을 앓다가 죽자 7일만에 남편의 뒤를 따라 목숨을 끊었다. 권용성과 권용엽은 형제간이었고 형과 아우가 전염병으로 죽자 김해 허씨와 밀양 박씨가 따라서 죽었던 것이다. 한 집안에서 두사람의 열녀가 탄생하자 집안에서도 가문을 빛낸 정절을 기리기 위해 二烈女門을 세웠다고 한다. 원주시 소초면 귀둔1리에 있는 二烈女門은 1887년에 세워졌으며, 한꺼번에 열녀가 탄생했다는 데서 世人의 감탄을 샀다.
박정숙 열녀 비각
남편 신경균씨가 불치의 병으로 부인의 온갖 정성도 아랑곳없이 결혼한 그 해 숨지고 말았다. 박정숙씨의 나이 18세 꽃다운 청춘이 피기도 전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3년상을 마치고 매일 눈물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시아버지께서 개가를 권유하였으나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자 시부모는 며느리를 자식같이 사랑하며 살았다. 그후 박열녀는 여성의 법도와 정절을 주장하며 90세의 노구를 끌고 한 많은 여인의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