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 강원여성
시대별 강원여성
예국시대
예국 여성들은 팔조(八條)교훈을 배우고 익혔다. 그래서 도둑질을 하지 않고 문을 닫고 자지 않았다. 여자는 모두 정조를 지키고 믿음이 있으며 음식은 그릇에 담아 먹었다. 성품은 욕심이 적었다.
남녀는 모두 깃이 꼬부라진 곡령(曲領)을 입었다. 산천을 소중히 여겼고 부계(部界)를 두어 이웃지방끼리 서로 간섭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같은 성끼리는 혼인하지 않고 모든 일에 꺼리는 것이 많았다. 사람이 중병으로 앓거나 죽는 일이 있으면 그 집을 헐어 버리고 새로 집을 지어 살았다.
삼을 심을 줄 알고 누에를 칠 줄 알아서 면포를 짜서 옷을 해 입었다. 새벽이면 일어나 별의 움직임을 보고풍년 들고 흉년 들 것을 미리 점쳤다.
10월 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가 되면 밤낮으로 술마시고 춤 추었으며 이를 무천(舞天)이라고 했다.
사당을 지어 범을 제사 지내고 이것을 신으로 여겼다. 부락에서 서로 침범하는 자가 있을 때는 소나 말로 갚게하는 벌을 주었다. 죽인자는 죽이고 도둑질 하는 자가 적고 보전(步戰)을 잘 했다.
예국의 여성들이 삼을 심고 누에 치고 음식을 그릇에 담아 먹고 정조를 지키며 산천을 소중히 여기고 같은 성끼리 혼인하지 않고 모든 일에 꺼리는 것이 많았다고 하는 것은 예국 여성들의 성품이 소박하고 정결하며 순수하고 지조있는, 그러면서도 정열적인 기질을 과시한다.
여용사의 어머니, 예국 시골의 할멈은 대지의 여신이요, 하늘이 내린 알을 받아서 옥동자를 탄생시키고 훌륭히 길러서 악(호랑이)을 퇴치하고 평화와 행복(종소리)을 구가하게 만든 어머니상이었다. 봄, 여름 농사를 짓고 길쌈을 하면서 열심히 거두어 무천제가 시작되면 음식을 장만하고 술을 빚어 잔치를 했다. 밤낮없이 노래하고 춤추었다. 무천축전은 그리하여 여성들이 놀이에 참여하는 광장이 되었다. 예국의 여용사 어머니가 삼신 할머니의 원초적인 모습이라면 무천축전에 춤추며 노래하는 예국여인들은 무희요 가수요 예인(藝人)이었다. 오늘의 한국 어머니상, 여성상을 이룬다.
맥국시대의 강원여성
맥국여성들은 깨끗한 옷입기를 좋아했고, 밤이면 남녀가 여럿이 모여 놀이와 음악을 즐겼다. 집에 술을 빚어 두고 먹기를 좋아했는데 술 빚는 솜씨가 좋았다. 그러나 음식은 절약했다. 데릴사위제도나 맥국여성들의 여러 가지 풍속은 고구려 풍속이지만 맥국사회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약혼이 성림되면 여자 집에서는 집부근에 따로 서옥을 지어 주었다.
여자집 부모의 허락 없이는 사위는 무상출입을 할 수 없었다.
반드시 장인, 장모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결혼 전 또는 후에도 사위는 여자집, 즉 처가를 위해서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낳은 아들, 딸이 성장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할 능력이 생긴 뒤에 신부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돌아갔다. 이 데릴사위 풍속은 고구려와 맥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동방 여러 민족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조선왕조 후기 까지도 행하여 졌다. 첫 아이를 친정에 가서 낳는 것도 데릴사위의 유풍이다.
조선시대의 강원여성
조선시대 여성을 위한 여성교과서가 편찬된 것은 성종(成宗) 때였다.
인수대비 소혜왕후 한(韓)씨가 「烈女」「女敎」「明鑑」「小學」등의 문헌에서 부녀교육에 필요한 것 만을 뽑아 7장을 만들고 여기에 다시 언역을 붙여서 출판한 3권으로 된「內訓」은 어디까지나 「부덕」을 장려하기 위한 것 이었다.
그 「內訓」의 제1권 혼례장에 삼종칠거를 내세웠다.
「집에 있어서는 아비를 좇고, 시집가면 남편을 좇고,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좇아 잠깐도 스스로 이루는 바가 없느니라」고 삼종을 강조했다. 여기에 더하여 부모께 불손하거나, 자식을 낳지 못하거나, 음란하거나, 질투하거나, 나쁜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남의 것을 훔치면 내친다는 칠거를 들고 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 굴레를 씌워 놓았던 삼종칠거의 관념은 실제로 생활규범이 되었다.
그리하여 여성의 미덕은 순종하는데 있었고 그 구체적 행동은 정절을 지키는데 있었다. 삼종의 굴레에 칠거의 짐을 졌던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미 7세가 되면 이성과의 면담이 허용되지 않았다. 외인의 출입이 차단되고 규방에 칩거해야 했다. 일단 결혼하면 열녀불경이부가 원리원칙이었다. 이리하여 열(列)은 강요되고 개가는 금지되었다.
병든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게 한다든가, 허벅지의 살을 베어 먹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게 되었고, 남편을 잡아 먹은 사나운 호랑이를 죽인다든가, 겨울에 잉어를 잡아 먹이고, 산삼을 캐어 먹였다는 화제가 꽃피기도 했다. 심지어 동물을 의인화하여 지은「장끼전」에서도 열을 강조하고 있다. 「아무리 미물인들 삼년상도 못마치고 개가하여 가는 법은 뉘 예문에 보았는가, 고담에 이른 말이 운종용하고 풍종호라 하며, 여필종부라 하였으니 임마다 따라갈까..」부자처지천야 라는 절대적인 윤리관을 내세우고 있다.
여성의 자유의지, 여성의 감정을 용납하지 않았다. 「행동함에 고개를 들지 말고 말함에 입술을 들지 말 것이며 앉음에 무릎을 움직이지 말고 섬에 머리를 흔들지 말고 좋음에 크게 웃지 말고 화냄에 큰소리 내지 마라, 내외간에 따로 거쳐 하며 남녀간에 따라 무리하며 벽 너머로 넘보지 말며 뜰 너머를 나가지 마라. 나감에 반드시 얼굴을 가리고 걸음에 반드시 몸을 감추고 남자는 권속이 아니면 더불어 통명하지 말고 여자는 선숙하지 아니하면 더불어 친하지 말라. 몸을 바로하고 단정히 하여 남을 다스림에 알맞도록 하라」「여논어」에 보이는 규방여성 몸가짐 규범은 규방여성들의 엄격했던 생활상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게 한다.
그런 속에서 규방생활이 이루어졌고 그 규방생활의 정서를 가장 훌륭히 그리면서 발랄하게 표현한 것이 허난설헌이다.
남자로부터의 자유, 인간으로부터, 세계로부터의 자유까지를 정서적으로 추구했던 허날설헌의 규방문학은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여성 내부의 움직임을 한결 순백으로 드러내 보여 준다.
현대
해방후 급속한 사회 변화속에서 두드러진 것이 여성의 의식변화와 사회적 진출이다. 가정에서 현모양처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식이 높아져 여성들은 다양한 사회참여와 지위개선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보이고 있다.
해방 이후 도내 여성활동은 사회구호를 위한 봉사활동에 여성이 동원되면서 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여성이 독립적인 영역에서 관심이 모아지기 시작한 것도 민간 차원에서 여성활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1948년 2월 대한부인회 도지부를 결성하여 야학과 강습회를 통한 여성계몽운동을 벌였으며 정부수립 후에는 국군 위문활동, 대북방송 등 애국활동을 폈다. 6. 25로 인해 끊겼던 여성활동을 적십자 봉사와 박애정신으로 다시 뭉쳐 폐허가 된 나라를 복구하는데 한 몫을 담당했다.
이어서 춘천 YMCA(66년), 한국부인회(67년), 여성저축생활중앙회(67년), 생활개선구락부(58년)등을 시작으로 전문분야 문화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여성단체들이 발족됐다. 이러한 단체들은 70년대 접어들어 활발한 활동을 벌였는데 허례허식 추방을 위한 캠페인, 소비자 계몽운동, 여성 저축생활계몽, 여성 교양강좌, 소비절약 및 식생활 개선 등 사업을 중점적으로 펼쳤다. 전국적인 조직으로 가지고 있는 여성단체 외에도 여성의 친목과 교양증진, 사회봉사 등을 목적으로 한 단체들이 증가하자 71년 12월 도내 각 여성단체 및 각급 대표회원으로 하는 협의회를 구성, 단체간의 정보교환 및 연합적인 활동을 펴기 시작해 산발적인 여성활동이 하나의 힘으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 활동은 해방 직후 여성 계몽과 정책 지원을 위한 활동으로 시작되어 생활개선, 소비절약 운동, 소비자 보호활동 등에 큰 영향력을 보였으나, 60년대 까지는 사교와 친목 중심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70년도에 접어들면서 여성의 의식 변화를 위한 교육과 소득증대사업 등 일부 소수계층의 전유물이던 것이 서민층을 포함한 다수의 여성을 포용하는 사업으로 전환되어 양적 질적 향상을 가져왔다.
현재 도내에 약 20여개의 단체가 있어 여성의 능력을 활용하고 사회참여,선도계몽, 교양교육을 통한 정보 및 기술습득과 권리신장을 위한 자원봉사 등의 단체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