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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생활문화

강원특별자치도의 농산물 활용 및 농촌생활문화 이해를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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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구조의 변천

주거구조의 변천




주거는 인간이 안주(安住)하기 위한 필수적인 공간이다. 인류는 수십세기를 살아오면서 자연과의 적응, 균형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치, 이미지, 지각, 생활양식을 주거에 표현해 오고 있다. 즉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문화적 환경요인, 거주자의 사회심리적 환경요인, 자연환경요인, 정치, 경제, 기술적 환경요인의 상호작용에 따라 정해진다고 할 수 있다.
원시시대의 움집으로부터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는 중·상류의 주거와 서민의 주거가 점차 차별화 되어 갔다. 근대에 와서 개화기와 일제시대에는 시대적인 영향으로 주거형태로 바뀌었으며, 1960년대에는 경제개발 계획이 실시되면서 취사, 난방의 분리 및 연료의 변화도 나타났다.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 주택 개량사업으로 농촌주택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 신개축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건축재료에 있어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또한 강원도 주택은 기후, 지형적인 특성이 잘 나타나 주택의 구조나 건축재료에도 특징이 있다. 타지역에 비교되는 특수가옥이 존재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러한 특징과 변화된 모습을 이 장(章)에서 정리하고자 한다.

선사시대의 주거 - 신석기시대

양양 오산리 유적

강원도에는 B.C 600년전의 선사유적으로 밝혀진 양양 오산리의 신석기시대 유적이 대표적이다. 오산리 유적의 주거지는 수혈 주거지가 아닌 지상가옥(地上家屋)으로서 평면형태는 원형 또는 타원형이었고 타원형의 경우 장축 대 단축의 비율은 1.2:1로서 원형에 가까웠다. 바닥은 5∼10cm 정도의 두께로 모래와 자갈이 섞인 진흙을 깔아 다졌고 때로는 그 위에 불을 때어 굳혔으며 평면의 중앙에는 타원형 또는 장방형의 화덕을 설치하였고 테두리는 돌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또 다른 하나는 바닥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경사진 점이 특이하고 기둥구멍을 찾을 수 없었으며 더러는 화덕주변에서 얼마간 떨어진 위치에 판석(板石)이나 깨어진 냇돌이 배치되었다.또 다른 주거지는 규모가 유달리 작고 화덕이 없는 점으로 보아 주거의 부속시설이나 저장시설로 생각되기도 한다. (강원도사 P.91)

춘천 내평유적

소양댐 수몰지역으로 황갈색 부식토층(표토층) 바로 밑에서 12.3m(동서)×4m(남북)의 범위에 돌이 깔려 있는 신석기시대의 부석주거지(敷石住居址)가 조사되었다.

청동기 문화기의 주거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로 평면형태는 장방형이 주종을 이루고, 방형과 원형은 소수이다. 수혈의 깊이는 20∼50cm 의 범위에 주로 분포하고 있어 수혈의 깊이도 점점 더 얕아지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바닥은 진흙을 다져 불에 굽거나 조개껍질을 섞어서 다지거나 진흙을 다져 그 위에 짚이나 풀을 깔고 생활했으며 몇 곳에서는 칸막이가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화덕은 두곳에 만들어지고 있는데 수혈내(竪穴內) 한쪽으로 치우쳐서 만들어져 수혈내의 공간은 화덕이 가까운 부분과 멀리 떨어진 부분으로 공간이 분할되고 다양화 기능화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강원도내의 유적지로는 춘천 온의동 유적, 춘천 중도 주거지가 있다. (강원도사 P.94)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주택(住宅)




고대(古代)에 속하는 삼국시대는 모두 중국대륙으로 부터 불교문화가 직·간접으로 도입되었고 이와 전후하여 많은 분야의 발달된 예술문화가 들어와 종래의 원시적인 문화단계를 벗어나 비약적인 문화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고구려

고구려 주택의 중요함은 온돌구조의 시원을 알 수 있는 것이고 벽화의 내용으로 보면 발방앗간, 용드레우물, 부엌, 육고, 마차고, 외양간이 그려져 있다. 이 시대의 서민주택은 원시적인 것이어서 원목을 그대로 건축부재로 사용하고 나무를 가구(架構)하는 데는 새끼나 덩쿨을 이용하여 얽어매어 벽체는 흙과 돌을 쌓아 만들고 지붕은 짚으로 이은 집에서 생활 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선사시대의 것과 별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다만 부엌이 방과 분리되어 방에는 칸막이가 생겨 住空間의 분할이 상당히 발전되었을 것이다.

백제

고구려의 서민주택과 큰 차이가 없는 건물이었을 것이고 고구려 보다는 좀더 따뜻한 지역이긴 하나 서민주택에서는 온돌이나 시원적(始原的)인 난방시설이 사용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라

신당서(新唐書)에 『화식(火食)을 하였으며 겨울에는 당중(堂中)에 부뚜막을 만들고 여름에는 음식을 얼음위에 놓는다』하였으므로 주거형편을 알 수 있다. 기후적으로 따뜻하므로 서민 주택은 대개 흙바닥이거나 벽돌바닥이었을 것이며 지상주거로 발전하고 풀로 이은 지붕과 움집도 상존했을 것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주택(住宅)




조선시대는 계층에 따라 상류, 중류, 서민의 주택으로 나뉘어 지는데 상류 주택의 경우 지역별 문화규범의 차이에 따라 가옥구조가 달리 나타나며 서민 이하의 주택은 기후 등 자연조건에 따라 가옥구조가 다르게 나타난다

강원도내(江原道內)의 상류주택

임경당(臨鏡堂,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지방문화제 제46호인 이 주택은 이율곡과 동시대(同時代) 인물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임경당 김열(金說)의 아호를 딴 것이다. 이 주택은 대문을 들어서면 벌당인 임경당이 마주 보이고 오른편에 사랑채가 연결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전형적인 공간인 사당을 배치하고 그 오른편으로는 좀 후퇴하여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된 ㅁ자형을 이룬다.

강릉권씨가(江陵權氏家, 강릉시 죽헌동)

이 주택은 ㄴ자형의 사랑채와 ㄱ자형의 안채가 서로 연결 배치되어 ㅁ자형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중문을 중심으로 서남쪽에는 사랑채가 놓이고 동북쪽에는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강릉 선교장(강릉시 운정동)



 

전면에 행랑채가 놓이고 그 뒤로는 ㄷ자형의 안 행랑채를 배치하여 솟은 대문 밖에서 시선을 차단하였고, 우측으로 ㅡ자형 안채와 ㄱ자형의 동별당이 서로 연결되어 여성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좌측으로는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이 배치되고 전면에는 차양이 설치되어 있다. 또 남성과 여성의 출입문을 달리 만들어 유교사상이 잘 나타나며 주택의 어귀에는 연당(蓮塘)을 파서 그 안에 정자를 배치하였고 연당 중앙에는 조산(造山)을 하여 소나무로 조경하였다.

정선 이종후(李種厚) 가옥 (정선군 임계면 봉산리)

이 주택은 조선 숙종때 이조판서 이자가 당쟁으로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은거하던 곳으로 사랑마당 북쪽에 별당인 수고당(守孤堂)이 정남향에 배치되고, 동쪽옆으로 1.2m 석축기단 위에 ㄴ자형인 사랑채와 ㄱ자형인 안채가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다. 안채는 중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면형태인 대청을 중심으로 한편으론 건넌방이, 그 반대편에는 웃방, 안방, 부엌등이 ㄱ자로 배치되었다. 이 주택은 안방부분이 영동지방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겹집 형태인 것이 특징이다.

서민주택




서민주택의 평면구성은 방, 대청, 부엌공간을 기본요소로 하여 결합되는데 영서지방은 서울형, 중부형을 기본으로 하고 영동지방은 북부형, 산간지역은 특수한 민가형태를 이룬다. 특히 평창, 정선, 삼척 등은 독특한 주거문화를 형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