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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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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남녀복식

조선시대의 복식




조선시대의 복식문화는 사회제도의 발전과 더불어 크게 발달하여 복식문화를 꽃 피웠으며 아름다운 한복 양식을 완성시킨 시기라 할 수 있다

남자복식

저고리

삼국시대의 긴 저고리가 짧아짐에 따라 선이 가슴 여밈에서 잘린 모양처럼 되었던 것이 앞으로 튀어나온 듯한 목판깃으로 바뀌고 안섶, 겉섶, 무가 넓어지고 품도 넓어졌다. 조선 중기에는 목판깃이 당코깃으로 변하고 무도 없어지면서 계속 변화하여 현재의 남자 저고리로 정착되었다. 여름에는 삼베, 모시로 지었고 봄, 가을에는 모시를 겹으로 지어 입었고 겨울에는 솜을 누빈 누비옷을 입었다. 비올때는 도롱이를 입었는데 짚이나 풀로 길게하여 상의에 걸쳐 입었다

바지와 두루마기

통이 넓은 바지와 좁은 바지가 있었으며 넓은 바지를 입을 때는 바지가 흘러 내리지 않게 허리띠를 메었고 발목을 대님으로 묶었다. 통이 좁은 바지는 주로 일을 할 때 입었는데 여름철에는 무릎길이의 잠방이를 입었으며, 삼베로 만들어 등거리 적삼과 함께 입었다.

두루마기

가장 오랫동안 보편적으로 사용한 겉옷으로 초기에는 목판깃이나 칼깃이고 옷길이가 종아리에 오고소매도 좁고품이 상당히 넓은 두루 막힌 옷이었으나 변화하여 동그래깃이 되고 무와 옷고름이 첨가되어 오늘날과 같은 두루마기가 정착되었다.두루마기는 예복으로도 사용되었다.

백관복

공무 집행때에 입는 관복은 제복이라 하고 평상 직무때에 입는 옷을 상복이라 하여 흉배로서 계급을 표시하였다.

옷을 만드는 법이 까다로워 시집갈 때에는 이런 옷본을 가지고 갔다.(좌) 백관 정2품이 착용했던 삽금대이다.(조선후기)(우)

서민복

서민 남자의 평상복은 바지와 저고리이고 외출이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소창의나 두루마기를 덧입었다. 소창의나 두루마기는 양반층에서는 중치막이나 도포 밑에 입던 중의이자 평상복이었으며 조선 말엽에 와서는 하천민에 이르기까지 도포의 착용이 보편화 되었고, 비활동적이라는 이유로 고종때에 단순화된 겉옷인 두루마기가 평상시의 예복이 되었다. 외출이나 의례를 위해 두루마기를 입은 뒤에는 갓을 쓰고 버선에 짚신을 신었다.

수복

남자의 수발 풍속은 쌍상투와 변발이 대표적이다. 미혼 남자의 땋은 머리, 묶은 머리는 결혼을 하게 되면 모두 정수리에 상투를 틀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머리를 촘촘히 땋고, 나쁜 일이 있을 때는 느슨하게, 부모가 병중일때는 의관 쓴 머리를 빗지 않았으며 상중에는 풀거나 삼이나 베로서 상투를 싸고 머리를 돌려 맸다.

관모

망건과 갓으로 머리를 정제하는 일이 기본 예절이었다. 초립은 가는 대나 나무껍질을 엮어 만들어 양반과 상민이 함께 착용했고 흑립은 말총으로 만들어 상류층에서만 착용했으나 중기에는 천민을 제외한 모두가 평등하게 썼다.

미혼 남녀는 주로 검은색 신을 신었으며 신코와 신둘레는 없었다. 조선 말에 장식신으로 꽃미투리와 꽃신이 있었고, 일반 서민은 짚신, 미투리, 나막신들을 주로 신었다. 짚신에는 재료에 따라 고운짚신, 쇠짚신, 엄짚신, 왕골짚신이 미투리는 삼신, 무리바닥, 절치, 탑골치 등으로 재료인 삼의 정제도에 따라 불렀다. 남녀 모두 우장용으로 나막신을 신었다.

여자복식




여자의 평상복은 저고리와 적삼, 치마, 단속곳, 바지, 속속곳, 다리속곳에 버선과 짚신이었다. 특히 속옷이 매우 발달하였으며 이에 따라 여자 치마는 독특한 실루엣을 갖게 되었으며 시대에 따라 유행의 물결을 타고 세부형태나 입는 방법이 변해 왔다.

저고리

고려말에서 조선조로 오면서 삼회장 저고리로 된 것이 여자 저고리에서의 독특한 변화였다. 조선 중기를 기점으로 저고리 길이가 짧아 졌으며 임진왜란을 계기로 짧은 저고리가 일반화 되었고 말엽에는 젖가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 지므로 가리개용 허리띠가 등장하였고 목면과 명주로 만들었으며 겨울에는 솜을 두어 사용했다. 계절마다 재료가 달랐고 겨울에는 저고리 위에 배자나 털까죽으로 속을 댄 갓저고리를 덧 입었다.

치마

저고리에 비하여 별다른 변화가 없었고 다만 길이와 넓이가 쓰임새에 따라 변했다고 볼 수 있다. 신분을 표시하는 수단으로서 양반 부녀는 넓고 길었으며 스란단을 대어 입었고 일반 부녀는 민치마를, 하속배는 두루치라는 치마를 입었다. 두루치는 민치마보다 폭이 좁고 길이가 짧아 속바지가 보일 정도였다.

속옷

조선시대의 복식미는 하체를 부풀려 둔부가 마치 종을 엎어 놓은 듯한 형상이었는데 속옷의 역할이 컸다. 속옷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으며 속바지류가 민족의 전통을 이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속옷의 종류는 1920년대부터 단순화 되었다.

궁중예복

왕비빈의 예복으로 대삼과 적의가 있었으며, 일상복으로 단삼, 노의, 장삼, 국의, 원삼이 있고 공주의 원삼과 활옷은 서민의 혼례복으로 착용하였다.

수복

얹은머리 모양은 상고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대표적인 머리였다. 얹은머리에 다래를 드려 머리를 크고 높게 할수록 아름답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름도 다양하였다. 그 후 변화하여 족두리와 쪽머리로 정착되었다. 수발도구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머리쓰개

내외법이 강하여 쓰개 종류가 많이 발달하였다. 장옷, 쓰개치마, 삿갓 따위가 있었으며 장옷은 두루마기와 같은 형태이고 쓰개치마는 치마와 같이 만들어 뒷말기를 달았으며 천의는 하천민의 머리쓰개였고 장옷보다 길이가 짧고 소매가 없었다. 겨울에는 아얌, 조바위, 남바위, 풍차, 굴레 같은 따뜻한 모자를 사용했다.

장신구

장신구의 사용은 상류층이 아니면 일반 서민의 경우 혼례 예복을 입을 때만 가능하였다. 패물은 몸에 차는 물건으로 노리개와 주머니로 구분되며 노리개는 화려하고도 섬세하며 궁중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즐겨 찼으며, 주머니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염낭과 귀주머니가 있었다.